봄기운이 완연한 경복궁 한편, 국립고궁박물관의 고요한 전시실에서 나는 시간을 거슬러 1791년의 어느 봄날로 초대받았다. 전시장 유리 너머로 마주한 유물들은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성군, 정조(正祖)의 지극한 효심과 신하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머물던 찰나의 기록이었다.
마음을 씻는 곳, 세심대에 오르다
최근 수묵화에 관심이 가던중 수묵화 한 자리에 글씨를 보며 간혹 그 글귀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중,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짙은 바탕에 금빛 글씨가 선명한 ‘세심대에 올라 지은 시를 새긴 현판(登洗心臺賞花口占懸板)’이다.
세심대(洗心臺). 말 그대로 ‘마음을 씻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본래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당, 경모궁 뒷동산에 있던 장소다. 정조에게 이곳은 단순히 풍경이 좋은 정자가 아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달래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며 오직 ‘성군’으로서의 길을 고민하던 내밀한 공간이었다.
현판에 새겨진 시 구절을 찬찬히 뜯어보면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심대에 올라 세속의 소란함을 씻네.
앉은 자리 주변에 노인이 많으니,
내년에도 또 오늘처럼 술 한 잔 하세나.
왕이라는 지엄한 무게를 내려놓고, 신하들과 함께 꽃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정조의 모습이 그려진다. 특히 ‘노인이 많으니 내년에도 함께하자’는 구절에서는 곁을 지키는 신료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묻어난다. 1791년(정조 15년) 3월, 즉위 15년을 맞이한 왕의 여유와 성숙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푸른 비단 위로 흐르는 금빛 서기(瑞氣)

사진 속 병풍은 깊은 감색 비단 위에 황금빛 실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수놓은 ‘자수 시문 병풍’입니다. 이 작품에 담긴 내용은 중국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屈原)의 시 〈이소(離騷)〉 중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왼쪽 하단에는 자수를 완성한 관기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금색 물감으로 정성스럽게 쓴 한 획한획이 힘있게 느껴집니다.
굴원의 〈이소〉는 자신의 결백함과 임금을 향한 충정,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고뇌를 아름다운 꽃과 풀에 비유하여 노래한 불후의 명작입니다.
붉은 종이 속 꿈틀대는 흑룡의 기상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만난 붉은 종이 위 용 그림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상상의 동물인 용은 왕의 권위와 수호의 상징이다.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이 용은 구름을 헤치고 나아가는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붉은 바탕색은 벽사(辟邪, 나쁜 기운을 물리침)의 의미와 더불어 왕실의 위엄을 상징한다. 정조가 이 그림을 보며 다짐했을 강력한 국가 건설의 의지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종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이러한 도안은 지금 그려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정교하다.
시대를 잇는 이음, 박물관에서의 조우
이번 전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마음을 씻을 나만의 ‘세심대’가 있는가?”
정조는 슬픔과 격무 속에서도 세심대에 올라 마음을 닦고, 시와 술로 신하들과 소통하며 더 나은 내일을 꿈꿨다. 거친 나뭇결 위에 새겨진 정조의 시구와 비단 위를 흐르는 금빛 글씨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경복궁의 담장을 넘어 박물관을 나서는 길, 정조가 사랑했던 3월의 봄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과거의 유물이 현재의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그리고 무한한 아이디어가 숨어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박물관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